"추석에 먹임 당하지 않는 법"을 온라인에 올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도 순간 멈칫했습니다. 명절 밥상이 두려운 아이들, 그 두려움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 어른들이 무심코 뱉었던 말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무심코 한 말이 트리거가 됩니다
저도 이 주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된 것도 주변에서 던진 외모 관련 말들이 시작이었습니다. 당시엔 그게 트리거(trigger)인 줄도 몰랐습니다. 여기서 트리거란 특정 심리 반응을 촉발하는 자극을 뜻하는데, 어릴수록 그 자극에 훨씬 취약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진료실에서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부모는 "살 빼라고 한 적 없다"고 하지만, 본인이 거울 앞에서 "어머, 나 또 쪘네"라고 중얼거린 것, TV를 보며 연예인 몸매를 평가한 것, 이런 일상의 말들이 아이 눈에는 선명하게 각인됩니다. 아이는 거기서 "살찌면 큰일 나는 거구나"를 배웁니다.
신체상(body imag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신체상이란 자신의 몸에 대해 스스로 형성하는 주관적 인식을 말하는데, 이것이 왜곡되면 실제보다 자신이 훨씬 뚱뚱하다고 느끼는 인지 오류가 생깁니다. 이 왜곡은 어릴 때 형성된 말과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극복하는 데 수년이 걸렸고,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치는 과정인지 잘 압니다.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말 유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녀 앞에서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 ("나 또 살쪘어, 큰일이다")
- 형제자매 외모를 비교하는 말 ("언니는 저렇게 날씬한데")
- TV나 SNS 속 타인 외모를 평가하는 대화 ("쟤 요즘 살쪘나봐")
- 아이 체중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놀리는 행동
SNS와 뼈말라 문화, 청소년 섭식장애로 이어집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뼈말라'라는 기준이 퍼지고 있습니다. 키에서 몸무게를 뺀 수치가 125 이상이면 뼈말라로 불리는데, 168cm 기준으로 43kg에 해당합니다. 이 수치를 동경하는 커뮤니티가 SNS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굶는 방법을 공유하고 서로의 식단을 검열합니다.

프로아나(Pro-Ana)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여기서 프로아나란 신경성 식욕부진증(Anorexia Nervosa)을 이상화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온라인 문화를 지칭합니다. 이 커뮤니티에 깊이 빠져든 아이들은 가족과 학교로부터 멀어지고, 점점 그 집단 안에서만 정체성을 찾으려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이단에 빠지는 구조와 유사하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초등학생 연령대의 하루 식단 사례를 보면 아침에 고구마 하나, 점심 굶기, 저녁 굶기 수준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 나이대에 필요한 하루 권장 칼로리는 1,600~2,000kcal 수준인데, 저렇게 먹으면 기본 영양 요건을 채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섭식장애(Eating Disorder), 즉 이팅 디스오더는 단순히 거식증이나 폭식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DSM-5(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라는 국제 진단 기준에는 2013년부터 폭식장애(Binge Eating Disorder)가 독립 항목으로 추가되었습니다. 빠르게 먹기, 배고프지 않아도 먹기, 먹은 뒤 과도한 운동으로 보상하기, 혼자 몰래 먹기 중 세 가지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반복되면 진단 기준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준이면 전문가 상담이 필요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먹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고, 음식이 하루의 감정을 결정하기 시작하면 그게 이미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저도 그 시기를 겪었고, 혼자 해결하려다 더 오래 걸렸습니다.
호주에서는 2024년 16세 미만의 소셜미디어 이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배경에는 SNS가 청소년의 자기 인식과 정신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있습니다(출처: 호주 정부 공식 사이트). 우리나라도 청소년 SNS 이용 환경에 대해 보다 진지한 정책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회복은 가능합니다, 단 방향이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 거의 완치 수준에 왔다고 느낍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된 건 "살 빼려고 하지 말고, 나를 위해 운동하자"는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하면 숫자에 집착하게 되고, 조금만 늘어도 하루가 무너집니다. 반면 건강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운동 자체가 즐거워지고, 음식도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회복을 돕는 가족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감시보다 지지"입니다. 냉장고를 몰래 확인하거나, 화장실 가는 것을 체크하거나, 체중 변화를 매일 묻는 행동은 아이를 더 극단으로 몰 수 있습니다. 대신 "네가 힘들면 내가 옆에 있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훨씬 효과적입니다.
치료 경로를 몰라서 전문가를 찾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섭식장애는 정신건강의학과뿐 아니라 가정의학과, 심지어 치과에서도 위산 역류로 인한 치아 손상을 통해 발견되기도 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가까운 정신건강복지센터나 한국 섭식장애 전문 상담 기관에 먼저 연락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식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가 되는 날, 그게 회복의 기준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그 지점에 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도 반드시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심리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섭식장애 관련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b8yivWFpk&list=PLZjOkV0EhTLeGYehdkLkhxAHR0XhBzYQm&index=14